詩다움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정일근]

초록여신 2008. 9. 11. 10:57

 

 

 

 

 

 

 

 

 

 

솔발산 산자락에 살면서부터

마당에 놓아둔 나무 책상에 앉아

시(詩)를 쓴다, 공책 펼쳐놓고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옛 동료들이 직장에서 일할 시간

나는 산골 마당이 새 직장이고

시가 유일한 직업이다

월급도 나오지 않고

의료보험 혜택도 없지만

나는 이 직장이 천직(天職)인 양 즐겁다

나의 새로운 직장 동료들은 풀꽃과 바람과

구름, 내가 중얼거리는 시를

풀꽃이 키를 세우고 엿듣고 있다

점심시간,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바람이 공책을 몰래 넘기고

구름이 내 시를 훔쳐 읽고 달아난다

내일이면 그들은 더 멋진 시 보여주며

나에게 약을 올릴 것이다

이 직장에서 꼴찌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열심히 마당으로 출근한다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문학사상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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