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유형진]

초록여신 2008. 7. 29. 13:32

 

 

 

 

 

 

 

 

 

 너를 생각하면서 이 문장을 쓴다.

 

 

생. 이라고 쓰면 나는 생강의 톡 쏘는 쓴맛,

그리고 비닐하우스 안의 정사를 생각한다.

겨울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은

나를 가두거나 풀어준다

 

 

생. 이라고 쓰면 나는 질긴 고무줄.

빚을 지고 허덕이다 젖먹이를 버리고 떠나는

누군가의 뒷모습.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겠지.

바보, 라고 말해버리면 그 순간 나는 바보.

똥개, 라고 말해버리면 그 순간 나는 똥개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얻기 위해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한다.

너는 오늘 밤, 빛나는 오리온을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누군가 사정하며 생을 빌릴 때도

오리온자리에서 알 수 없는 빛이 흘렀지.

그 빛을 평생의 빚으로 누군가는 허덕이며 간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향해.

 

 

생. 헐떡헐떡.

 

 

 

 

 

 

*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8 올해의 좋은시 / 현대문학, 2008.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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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허혜정(문학평론가. 한국사이버대 교수)

 

문장은 단정해야 하는 걸까. 문장은 의미의 조직과 질서를 노리지만 시의 언어는 의미의 독단과 문법의 질서 속에 갇히지 않는다. 시는 사랑에 빠진 자의 언어처럼 수많은 허깨비를 생산한다. "너"는 그의 문장 속에 흐르는 열정의 난류이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격정의 순간이며 말들 안에서 말을 깨는 힘이다. 그것은 거칠게 휘몰아치는 소란이고 일상의 문법에 대한 교란이다. 물론 너를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단정하게 정리되지 않는 문장처럼 "너"는 그의 삶 곳곳으로 밀치고 들어온다. 가장 열렬하게 "생"을 꿈꾸는 순간처럼, 오리온자리의 빛을 저장한 유일한 한순간처럼. 창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도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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