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썩지 않는 생선 꼬리를 맡으며
나는 누구의 이름을 생각해냈던가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며 낡아간다 지워지고 흔들리며
지붕은 속살이 드러나
그곳에선 빤히 혼자라는 게 허기처럼 떠오르고
태양계를 벗어나는 탐사선처럼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살마다 녹슨 새장은 스스로를 속박한다
들떠 일어난 천장의 페인트가 나방처럼 날개를 젓고
버려진 스패너들 검어진다 네 얼굴처럼
묽게 칠한 그의 아랫도리가 가리고 있는
두 개의 흐린 눈은
언제를 기억해내려 했던가
해가 흘린 피를 유리창이 반사한다
광택을 잃은 구 층 아파트의 허물어지는 베란다
느리게 몸을 열고
거품을 무는 바다에서 세가 제 흰색을 공중에 그린다
짙은 물이 고인 거대한 욕조 바닥
마개를 뽑을 때 들리는 비명 소리는 언제나 물리지 않았지만
더럽혀진 젖은 손가락은 결국 어디를 가리켰는가
*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8 올해의 좋은시 / 현대문학, 2008.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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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광호(문학평론가. 서울예대 교수)
어떤 폐허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을 "건물의 사체"라고 말할 수 있거나, '인공물이 자연에 근접하여 낡아"가는 상황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런 공간에 대한 묘사는 공간을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공간의 시간적 징후들을 포착한다. 혹은 그 공간 속에 스며 있는 너와 나의 비인칭적인 얼굴들을 찾아낸다. 거기서 이 공간은 어떤 익명적인 기억의 자리며, 동시에 다른 죽음을 상상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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