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표범약사의 이중생활 [문혜진]

초록여신 2008. 7. 3. 12:26

 

 

 

 

 

 

 

 

 

 

 

낮에는 약국에서 조신하게 약을 팔고

밤이면 날카로운 발톱을 찍어 나무에 기어오르지

가로수 꼭대기 은신처에서 사냥을 준비한다

살의로 번뜩이는 눈

흰 가운을 벗어 던지고

윤기 나는 털을 정성스레 고른 후

등뼈를 이완시켜 굳어 있던 근육을 푼다

 

 

안개 낀 여름밤

아파트 배관을 타고

창이 열린 베란다로 스르르 들어간다

거실을 지나

아이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겹겹의 어둠 속에서

기습적으로

소리 없이 다가가는 위험

 

 

그의 고향은

갠지스 강의 두 원류가 만나는 곳

이끼와 공작고사리로 뒤덮인 사원

순례자 여인을 표적으로

어미에게 첫 사냥을 배웠다

밤새 기도하던 사람들은

다음 날 여자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표범약사는

가로수 가지에 시체를 걸쳐 두고

머리부터 살점을 깨끗이 발라 먹기 시작했다

 

 

겨우 겨우 피의 위안으로

문명을 견뎌 내는 표범약사

 

 

 

 

 

 

* 검은 표범 여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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