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경계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 [한승원]

초록여신 2008. 6. 20. 09:33

경계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 *

ㅡ 토굴 다담 12

 

 

 

 

 

 

농부가 이웃의 대밭에서 자기네 채마밭으로 뻗어온 솜대나무 뿌리를 파서 던지고, 대 뿌리가 다시는 건너오지 못하게 하려고 밭과 대밭 사이에 허벅다리 잠길 만큼의 도랑을 팠습니다.

 시인은 그 대 뿌리들을 서재의 서편 창문 앞 울타리에 심고, 이듬해부터 달이 서편으로 기우는 무렵 서창에 비치는 수묵의 대 그림자를 완상하고, 속 텅비고 올곧게 살아가는 대나무 속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대나무로 하여금 자기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경계 허물기를 즐겼습니다.

 삼 년 뒤, 서편 울타리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금잔디 마당 안쪽에서 죽순 하나가 솟아나왔을 때 시인은 경계를 허무는 그놈을 용납할 수 없어서 잘라냈습니다.

그 이듬해 5월부터는 마당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죽순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서재 서쪽 구석의 바람벽과 장판의 굽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갈색 창끝 같은 머리를 들이밀고 있어 소스라쳐 놀라 살펴보니 죽순이었습니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시인은 독한 마음먹고 그놈의 허리를 잘라버린 다음 우둔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하늘을 향해 '아, 하느님, 나 죽고 나면, 경계를 허무는 이놈들 때문에 내 집은 무성한 솜대나무 밭이 되어버릴 터입니다' 하고 말하자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그게 자연이라는 것이다.'

 

 

 

 

 

 * 함민복의 시집 제목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에서 차운.

 

 

 

 

 

* 달 긷는 집 / 문학과지성사, 2008.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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