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전
고 영 민
자면서 그대가 나에게 다리를 올려놓는 시간 내가 이불을 당겨 그대의
배를 덮어주는 시간
아무 것도 모른 채 쿨쿨 자는 시간
밤새 무거운 머리를 들고 있는 베개처럼, 읽다가 머리맡에 엎어놓은 책처럼
죽은 그대가 뜬눈으로 내 옆에 일년을 앉아 있는 시간
자다 말고 일어나 그대가 몇모금 목을 축이는 시간
습관처럼 자는 척하는 시간
또 저물듯 시간이 몸을 지나가고
구들이 식고
그대 잠 속으로 다시 천천히 숨어드는 시간
문득 내 살던 집의 팽나무가 보고 싶은 시간 병든 아버지의 이마를
짚어주는 시간 산란을 위해 옴두꺼비가 느리게 국도를 건너는 시간
내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간 이유 없이 등 뒤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
공기가 벙긋이 웃는 시간
지구가 천천히 돌아가는 시간
_《사슴공원에서》(창비, 2012)
ᆢ
오늘도 지구는 천천히 제 길을 돌고,
그 지구 위에서 나도 천천히 걷고,
함께 건너는 동안
이 현재의 지구 위의 시간에서
오늘도 감사를 배우며.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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