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사이
이 응 준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이 세상에 두려운 일이 없었다면 당신이 나를 믿어 주었겠습니까? 내가 세상의 얼룩이 아니었던들 당신이 나를 아는 척이나 했겠습니까? 작은 나무 하나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말이 너무 슬퍼서 나는 일부러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디에든 누구의 것으로든, 반쯤 타 버린 불쏘시개 같은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갔으니 또다시 가을이 아니라, 가을과 겨울 그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디에든 누구의 것으로든, 삶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그사이이듯이, 나는 세상이 두렵습니다. 세상의 얼룩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이 세상과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당신의 고통임을 압니다.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_《목화, 어두운 마음의 깊이》(민음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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