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의 존엄성
김 중 일
내가 태어난 해 보이저1호는 나와 똑같이 빚어진 눈사람 한명을 태우고 우주로 발사되었다.
적막의 플라스마를 통과해온 보이저 1호가 태양의 국경을 이탈해 항진한지 정확히 얼마나 지났을까. 이 별들의 경계로 부터……
측량할 수 없다 슬픔의 반감기에 대해.
완벽히 사랑하고도 계속해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완전히 사라지고도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는
충분히 멀어지고도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놀라운 공식에 대해.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존엄성이 있는가.
사라지기 때문에 존엄성이 있는가.
적설 위에서 벌어지는 해와 달의 농성 속에 하얀 피 흘리며 타오르는 눈사람의 존엄성은 있는가.
흰 모자를 들추면 광막하게 펼쳐지는 어둠의 수열 속에 눈사람의 존엄성은 있는가.
미지근한 체온의 손과 흰 건반 위를 함부로 뛰어다니는 발자국과 팝콘처럼 일생 흘려온 웃음이 모두 뭉쳐져 한꺼번에 녹고 있는
밤과 새벽 사이의 두꺼운 적요를 덮고 녹아서 사라지는 중인
눈사람의 알전구처럼 하얀 알몸의 피부 밑에 눈부신 존엄성이 숨겨져 있는가.
번번이 존엄성은 왜 숨겨져 있는가.
지금 이 시각 눈사람은 왜 또 혼자 켜져 있는가.
소통을 메고 수색 중이던 사람이 공깃돌을 주워 눈사람의 떨어진 눈알을 다시 몰래 붙여준다.
그는 눈사람의 자손이다. 그는 눈사람이다.
아주 긴 세월에 걸쳐 그의 부모가 둥근 등뼈와 흰 머리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 사실은 가문의 비밀이었다.
눈사람은 눈 깜박할 사이 사라지는 사람.
햇빛으로 짠 관에 눈사람이 실려간 후에도 눈사람이 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렸는지 그 사람은 모를 것이다.
공중은 매년 함께 돌려 입은 옷 눈발이 보풀처럼 일고
촛불을 삼킨 눈사람의 몸 밖으로 비어져 나온 불꽃이 입술이다.
불타는 그 입술에 입 맞춰라.
그 입술을 훅 불어 끄고 그만 뒤돌아서라.
캄캄해지게 더욱 캄캄해지게.
더 이상 아무도 앞이 안 보이게.
몰아치는 눈발 속 공중이라는 자궁 속에서 마냥 서 있는 저 눈사람 한명도 이제 꺼내주었으면.
새벽에는 눈사람 옆 자작나무가 헛구역질을 하며 백마 한 마리를 낳았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빙판처럼 길에 누웠다가 서리처럼 창문마다 기대 있던
백마는 비칠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눈사람을 핥으며 목을 축였다.
빙판과 서리와 그와 나는 다 같은 눈사람이다.
우리는 태양의 아랫목에서 고작 수십년에 걸쳐 녹고 있다.
내가 사랑한 눈사람들.
마지막으로 누군가 저 달을 번쩍 들어 지구 위에 한몸으로 올려놓을 때까지
우리의 아이는 지구상에 단 한발의 총성도 폭발도 비명도 함성도 없는 기적 같은 어느
밤중에 태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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