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미안의 안녕 [김중일]

초록여신 2017. 12. 19. 12:14


미안의 안녕

  김 중 일








 마침내 나는 오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기후를 가졌다. 봄비가 눈으로 뒤바뀌었고 우산은 비와 눈 사이에 꽂혀 있다. 가장 높은 하늘을 나는 도중 정전처럼 불시에 숨이 끊긴 새들의 찰나를 드디어 나도 가지게 되었다. 오랫동안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은 내 가슴속으로 조금씩 스며들어 흔적이 없다. 나는 온몸을 샅샅이 뒤져 꽃다발을 찾다가 우연히 누가 놓고 간 우산을 주웠다. 구름들과 한 우산 속에서 어깨 겯고 광화문 앞 희뿌연 폭설을 뚫으며 걸었다. 유빙처럼 표류하던 버스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한가닥의 자일을 그러잡듯 우산 하나씩 꼭 붙잡았다. 오직 터진 허공 같은 우산을 악착같이 붙잡은 사람들만 서서히 녹아 가라앉고 있었다. 이토록 가엾고 선량한 우산을 언젠가 제 손으로 고이 접어 잃어버릴 수 있도록 오늘만은 놓치지 않게 꼭 붙잡고 있었다. 내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 우산과 함께 유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건네지 못한 커다란 꽃다발 같은 우산을 잃어버리고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무지개를 가졌다. 내 이별은 안녕을 가지게 되었다. 대신 내 미안은 안녕을 가지지 못했다.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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