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의 쓸모
손 택 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 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아마도 복수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 보단
시집도 시도 시인도 다 버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절판된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제14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종후보작 중에서(중앙일보 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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