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시집의 쓸모 [손택수]

초록여신 2014. 11. 25. 21:24


시집의 쓸모

 손 택 수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

십 년도 더 전에 선물한 내 첫 시집,

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냐며

시종 미안한 얼굴이다

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

차마 말은 못하고 건성으로 수저질을 하다가

(아마도 복수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집이 이토록 쓸모도 있구나

책꽂이에 얌전히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기 보단

시집도 시도 시인도 다 버리고

한쪽 다리가 성치 않은 식탁 아래로 내려가

균형을 잡고 있는, 국그릇 넘치지 않게

평형을 잡아주는, 오래전에 절판된 시집

이제는 표지색도 다 닳아 지워져가는 그것이

안주인 된장국마냥 뜨끈하게 상한 속을 달래주는 것이었다




*제14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종후보작 중에서(중앙일보 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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