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상처의 신발 [김혜순]

초록여신 2013. 12. 28. 08:07

 

상처의 신발

 김 혜 순

 

 

 

 

 

 

 

 

 

상처에 발을 집어넣는다

상처를 신고 다닌다

아니면 상처가 냄새나는 발을 품고 다니는 건가

상처는 나를 위한 피고름 틀이다

 

 

상처로 지은 신발은 꽃투성이

내가 발을 집어넣으면 진분홍 피톨들이 짓이겨진다

상처로 지은 신발은 배를 가른 닭의 목구멍

내가 발을 집어넣으면 작은 갈비뼈들이 우두둑 부러진다

상처로 지은 신발은 열린 무덤

내가 발을 집어넣으면 엄마 아빠 무덤 두 개가

내 왼발오른발에 신겨진다

 

 

상처의 신발은 가끔 발작하지만 대개는 참는다

물집이 터지고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진분홍 입술을 앙다물고 내 더러운 두 발을 이빨에 문다

신발이 아픈지 안 아픈지 내 두 발은 모른다

 

 

상처의 신발은 방향 감각이 없다

늘 거기가 여기고 여기가 거기다

상처의 신발은 내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여기라고 주장한다

상처의 신발이 디딘 곳, 그곳이 내 잠깐의 영토다

신발이 커지면 발도 커진다

나는 뜨거운 쌀자루만큼 커진 신발을 신고

배 갈라진 채 달아나느 흰 돼지처럼 뛰어오른다

 

 

상처로 지은 신발 속은 밥알투성이다

내가 잘 지은 밭솥에 발을 집어넣는다

밥알들이 작은 생선 알들처럼 내 발밑에서 짓뭉개진다

상처로 지은 신발은 엄마의 늘어진 가슴 두 쪽이다

신발이 바닥에 닿으면 우유 같은 눈물 번진 흔적!

파리 떼 가득 붙은 뜨끈한 누군가의 목구멍 속으로

고린내 나는 발가락을 집어넣는 이 감촉!

 

 

나는 지금 바깥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처투성이를 신고 땡볕 속을 걸어가고 있다

 

 

 

 

* 슬픔치약 거울크림(문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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