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초록손바닥 [권자미]

초록여신 2012. 6. 19. 16:51

 

초록손바닥

 권 자 미

 

 

 

 

 

 

 

 

 

상추밭에 앉아 풀 뽑는다

 

 

호미질한다

이곳에서 땄을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들의 부루

 

 

사그락 사락 흙 갈라지는 소리, 사방에 가득하다

 

 

내 할머니 발뒤꿈치에서 부서진 살 부스러기

땀방울 머리카락 눈곱 닿은 손톱조각 그 사소한 것까지

밭 갈다 빠진 소의 긴 속눈썹 하나와 새참 먹다 고수레 던진 찬방덩어리까지

하다못해 소 부리던 영감들 가래침과 잔소리까지도

흙이 되어

 

 

평온하다

보드라운 살결이다

 

 

상추가 손을 내민다, 덥석

손을 맞부벼 잡아본다

 

 

착한 손바닥

초록쪽으로 불끈 힘이 곧추서고

몸으론 흰 젖이 돈다

 

 

 

* 지독한 초록 / 애지, 2012. 5. 29.

 

 

 

 권자미 시인의 시는 읽을수록 눈물겹다. 그러나 이러한 눈물겨움은 기쁨이나 슬픔의 이분법으로 분해되지 않는 보다 오묘한 문학적 독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2005년 등단할 때부터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아주 독특한 시적 개성으로 뭇 시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청량산의 그윽한 높이와 부석사의 생뚱맞은 신화 속으로 무녀리 가시나처럼 겁도 없이 돌진하는가 하면, 작품 곳곳에 판소리의 말과 몸짓과 아니리도 배어있다. 누룽지 맛이 나는 민요타령의 배꼽 잡는 어조도 일찌감치 제 것으로 삼아 눈비음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능청을 떨고 있다. 시치미를 떼어놓고 되려 떼쓰는 이러한 발랄한 상상력은 마치 쥔 주먹을 펴면 포르르 날아오르는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사뭇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가 구사하는 토속적인 시어의 감칠맛은 독자의 눈을 가린 백석의 방언보다도 훨씬 맵짠 시적 효과를 발휘하여 새콤달콤한 눈물겨움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살갑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그냥 툭 떨어지며 부서지는 고드름의 싱거운 패러다임같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저 멀리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감지하는 초능력의 안테나가 빼어난 이미지로 반짝이고 있다.

 자미여, 자미여. 그대 머리 위의 면류관은 절절한 아픔이지만, 이것이 바로 한 시인의 생애를 전율케하는 운명적 모티브가 된다는 점을 젤 잘 아는 자미여.

ㅡ오탁번(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

지독한 초록을 시집에 담아주시고 그 담겨진 초록을 그득 선물해주신 홍정순 시인께 고마움 전합니다.

초록, 초록, 초록의 싱싱한 그늘 밑에서 쉬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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