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여름'이란 말 [장석주]

초록여신 2012. 2. 9. 09:21

 

'여름'이란 말

ㅡ 주역시편· 130

 

 

 

 

 

 

 

 

 

맑고 고요한 여름을 좋아했네.

여름들이 지나가는 중이네.

그토록 많은 그림자들이

죽는다는 뜻이네.

여름은 얼마나 많은 열매, 열매, 열매들을

제 품에 안고 있는가?

열매들은 명랑한 노래를 들려주네.

여름은 명랑한 계절.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여름의 모든

고독들을 사랑하네.

하루를 탕진한 황혼이

서쪽 하늘에 넓게 퍼지네.

지금 밭에서는 귀들이 자라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으려는 귀들.

좌측통행에 집착하는 사람들,

고양이를 고층 아파트에서 내던지고

개의 두개골에 못을 막는 사람들,

불공정 계약에 익숙하고

노조와 아침우유를 거부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과 전쟁 중이네.

그들 속에 든 이것은 뭐란 말인가?

나는 등고선과 아침 햇살과 국수를 사랑하지만

올 여름의 기후는 예측하기 어렵네.

여름의 지리학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 와 있네.

여름이 대지에서 기르는 것은 돌들.

햇빛 속에서 쑥쑥 자라는 돌들.

돌들의 욕망은 알 수가 없네.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돌들.

만약 우연과 신과 돌들의 욕망을 알 수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덜 행복했겠지.

여름은 경계선을 새롭게 긋네.

여름의 다리를 건너고

여름의 문턱을 넘어서

나는 밀려오는 다정한 실패들을 사랑할 것이네.

더 흴 수는 없는 햇빛들,

빗발에 진 플라타너스 이파리들,

나무에 붙어 맹렬하게 우는 매미들,

좋아요, 좋아요!

익사하는 대신에 살기를 선택한 여자들이

예술의전당 미술관 앞 광장을 지나가네.

항구마다 포경선들은 쉬고

여름의 점성술 책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네.

내 안에서 자라는 여름의 여름들,

탬버린을 치며 왔다가 탬버린을 치며 떠나는

안녕, 이미 까마득한

여름들!

 

 

 

* 오랫동안, 문예중앙(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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