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패배'라는 말 [장석주]

초록여신 2012. 2. 9. 09:08

 

'패배'라는 말

ㅡ 주역시편· 310

 

 

 

 

 

 

 

 

상처들의 봉합,

금관악기가 빠진 교향악곡 연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딘가 불완전하다.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지던 곡우 지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패는 이상한 하지도 지난다.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발달심리학 책을 들여다보던 19세도,

소녀의 따귀를 때리고 뛰쳐나온 이층집도 있다.

스물다섯 살이면 생활의 달인,

간접화법으로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

분유 두 통을 사 돌아가는 소시민 가장.

그림자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지평선은 가장 먼 곳에 있다.

먼 곳은 바라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먼 곳이 아니다.

내 안의 우울이 우물이 되고

고독은 차라리 천직이 되었을 때

가끔 무릎을 꿇고 '패배'라는 말을

혼자 되뇌곤 했었지.

나는 스무 살 이후 길을 잃었다.

갈 수 없는 길들이 술 마시게 했다.

이 빠진 술잔들에 입술을 대며

더는 '패배'라는 말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땡볕에 얼굴과 팔이 그을린 여름 소년은

무지개라도 먹고 싶었다.

어린 시절 뒤를 돌아보면

흙속에 묻힌 사금파리들이 반짝거리듯

미래가 보였지.

반쯤 뜬 눈으로 지나간 노란 꽃들을 바라보자,

'패배'를 더는 모르는 불행을,

내일의 내일이거나

혹은 사물들의 사물들을!

 

 

 

 

* 오랫동안 / 문예중앙, 201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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