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불안의 운필법 [조용미]

초록여신 2011. 9. 25. 08:40

 

 

 

 

 

 

 

 

 

 

 

 불안하고 또 불안한 내면을 가졌으리라 짐작되는 이 사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여 늘 마음이 들끓거나 지나치게 고요했으리라 여겨지는 이 사내의 그림 한 점과 글씨를 직접 보았던 날 나는 사내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그의 글 앞에 아주 오래 세워두고 마음껏 어떤 알 수 없는 고통과 희열에 열중하게 했다 그날 이후 서화를 보거나 한가하게 혼자 앉아 있을 적이면 사내의 글과 그림보다 그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며 지나갔을 어떤 물결이나 바람 같은 것이 더 궁금하였다

 

 

 매화와 사내의 글씨가 인쇄된 천으로 된 커다란 가방을 두 해 가까이 방의 벽에 걸어두고 보았지만 그 사내에 대한 쓸데없는 기록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가도 애써 알아보지 않은 점도 돌이켜보니 괴이하다

 

 

 瘦金體라 불리는 가늘고 야윈 획을 구사한 그의 서체는 붓을 멈추거나 꺾었던 흔적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 예민했던 그의 눈길이나 손놀림을 따라가보며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했지만 그 어지러워진 마음 뒤에 한참을 더 한적해지는 고운 일도 많았다

 

 

 사내의 단지 뼈대만 남아 있는 신경질적인 운필법이 나의 몸 어딘가와 친밀하게 마주 보려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글과 그림에 탐닉한 북송의 황제였던 이 사내는 어떤 이들에겐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무능하고 치욕적인 왕으로만 보인다고 하니

 

 

 내가 늘 바라보는 것은 사내의 뒷모습, 팔굉을 두루 관람하고 사해를 다 밟아보지 못하더라도 생각의 폭을 넓힐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 보아야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사내와의 만남은 그저 이러하였다 내가 잘 모르는 그 사내는 徽宗이라 불린다

 

 

 

* 기억의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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