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이 정지된 복사기 속을 들여다본다
사각형의 투명한 내부는 저마다의
어둠을 껴안고 단단히 굳어 있다
숙면에 든 저 어둠을 깨우려면 먼저 전원 플러그를
연결하고 감전되어 흐르는 열기를 기다려야 한다
예열되는 시간의 만만찮음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불덩이처럼 내 온몸이 달아오를 때
가벼운 손가락의 터치에 몸을 맡기면
가로세로 빛살 무늬, 스스로 환하게 빛을 발한다
복사기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훑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나를 읽고 있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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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옥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매일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뭇별이 총총 / 실천문학사, 2011.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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