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옷이 마르는 사이 [길상호]

초록여신 2010. 12. 5. 11:17

 

 

 

 

 

 

 

 

 

 

널어놓은 옷이 마르는 사이

축축한 영혼이 서성이는 걸 봤어

빨래처럼 구겨진 얼굴을 하고

구멍 난 발자국 찍으면서

앞마당을 걷고 있었어

올이 다 풀린 입으로

나를 돌아보며 웃기도 했어

빛바랜 지 오래된 웃음이

쓸쓸하고 또 쓸쓸해서

어떤 표정으로도 그를 대할 수 없었어

잔뜩 물먹은 머리는

짜도 짜도 여전히 무거웠어

바람이 오래 펄럭이고 간 후에야

겨우 영혼은 희미해져 있었지

그가 찍고 다닌 물방울의 발자국도

풍겨오던 체취도

바람을 따라 자취를 감췄어

건조대의 옷이 마르는 사이

내가 또 한 번 사라지고 말았어

 

 

 

* 눈의 심장을 받았네, 실천문학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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