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시인의 근황 [류근]

초록여신 2010. 4. 14. 00:15

 

 

 

 

 

 

 

 

 

 

 

모처럼 우연히 만난 유명 시인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묻자

그는 일행들에게 농담이나 건넬 뿐

내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술김에 또 지고 싶지 않아서

유명 시인이 되면 묻는 말에 대답 안 하고

그러는 건가 보지?

그렇게 혼잣말처럼 궁시렁거렸던 것인데

이윽고 유명 시인이 한마디했다

 

 

시인한테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는 좀 억울했다

도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몰라서

진심으로 물었던 건데

그런 것 좀 자상하게 일러주면 안 되나?

 

 

어쩌다 아무런 연고 없이 합석하게 된 술자리에서

그냥 앉아 있기 어색해서

곁에 앉은 여자 시인에게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러자 그 여자 시인이 대답했다

전과 다름없이……

 

 

괜한 걸 물었다가

괜히 상처받는 이 버릇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시인에게 근황을 묻지 말자

시인이란 전과 다름없이 지내면서

대답할 필요도 없이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

 

 

 

* 상처적 체질, 문학과 지성사(20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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