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빈 들녙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시인 류근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이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는 하지 않았다.
* 상처적 체질 / 문학과 지성사, 2010.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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