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적막과 햇빛 사이 [김소연]

초록여신 2010. 3. 23. 03:01

 

 

 

 

 

 

 

 

 

 

 아주 잠깐은 푸르스름한 적막만이 이 방에 찾아온 손님

 차 한 잔을 내와서 마주앉는다

 

 

 후박나무가 잎사귀 흔들며 따갑게 퍼덕인다 줄기를 기어가는 작은 발 개미 하나 그 뒤에 또 하나 또 하나 발발거리는 발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런 시간에 시를 썼을까

 술 마시느라 밤을 새운 매월당 김시습

 헤어지며 드리는 시를 썼을까

 홍랑 매창 옥봉 그녀들도

 이런 시간에

 

 

 고요해서 다 들리는 이 시간에

 적막해서 다 보이는 이 시간에

 

 

 껴안았을 때에만 느껴지는 당신의 맥박처럼, 덜컥덜컥 희미하게 다가오는 문산행 기차와 형광등에게 필사적으로 가 닿았다 까맣게 내려앉은 하루살이들과 1억 5천 킬로미터를 직진으로 달려오는 햇빛과

 

 

 침묵으로 말해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침묵함으로써 돌아앉아 시를 써온 나와 함께

 찻숟가락을 입에 물고 마주보며 웃는다

 

 

 새벽이 크나큰 손을 뻗어

 죽어가던 한세상 눈꺼풀을 마저 덮어준다

 

 

 햇빛이 난간에 매달린 적막을 떼어낼 때 세상이 살아있다는 건 모두 거짓말, 떨어지며 절규하는 적막 덕분에 고막이 터진다 지금은 시를 쓸 시간

 

 

 

 

*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2006)

 

 

적막과 적막 사이

왕후박나무의 그녀도 잠들었다.

 

새벽을 기다리며 경찰서의 빛을 훔치다.

지금은 잠잘 시간…

(드러나는 새벽 앞에 다시 잠을 청하다,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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