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시장에서 보낸 한 철 [김명기]

초록여신 2010. 2. 25. 11:23

 

 

 

 

 

 

 

 

 

 

 

그러니까 이곳은

시장이라는 어감이 주는 보편적 느낌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관에 등재된 재래시장의 재래성을 이곳에서 찾기란 드문 일이다

먼 바다에서 돌아와 팔리지 않는 시들은 써서 묵혀두고

내 지적 수준보다 과장이나 가장으로 버무려진 영역의 글들은 쓴 값이나

날품처럼 팔고 다닌 행사의 값으로 한동안 살아가다

그것마저 드문해지고 시들해질 즈음 살아갈 또 다른 값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동안 지독이란 말보다 위독이란 말이 더 어울리는 짧은 사랑이 한 차례 지나가기도 했다

 

 

어디선가 큰 트럭들이 들어와 무엇인가를 부려놓고 가면

그보다 작은 트럭들이 그것들을 다시 싣고 어디론가 사라지곤 한다

가끔 그렇게 실려 가는 것이 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아마 쓰임새라는 말 때문일 것이다

어느 곳에선가의 쓰임새를 위해 실려 왔다 실려가는 것들

위독했던 사랑이 집어던져 놓고 간 알 수 없는 내 쓰임새 값에 대해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실려 가면

그 값을 정확히 치러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사라져가는 트럭 꽁무니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따라가 보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은 볕이 이따금 들리듯 지나가는 나란한 건물 제일 안쪽 끝이어서

바람이 불 때면 온갖 것들이 차례로 몰려와 쌓이기도 하는데

박스를 묶었던 노란 밴딩끝들 양파를 넣었던 붉은 망태들

부스스한 파 껍질과 스티로폼 박스들

쓰임새를 다하고 결국 아무렇게나 버려져 더 이상 경건함을 기대하기 힘든 것들이다

 

 

틈틈이 그것들을 차분히 쓸어 모을 때면

여기저기 시침질 같은 눈들이 지켜보기도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넣어

쓸모없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장소에 공손히 가져다 놓는 일인데

이 시장 안에서 내가 살아가기 위한 또 다른 값이

무엇인가의 쓸모없음을 확인하는 일이라면 경건함을 잃어버린 짧은 사랑도

아주 공손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이 시장에 막 도착해 부려진

아직 흥정 끝나지 않은 미결의 값이다

먼 바다에서 돌아올 때처럼 허튼 약속들이 위독해진 채

또 어디론가 실려 갈지

아니면 오래 이곳에서 묵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지어지지 않은

 

 

 

 

*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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