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만큼 깊어지는 여자의 우울과
우울을 모독하고 싶은 악의 때문에
창문 꼭꼭 닫아둔 여자의 베란다에선
여린 식물들부터 차례대로 말라 죽기 시작했다
볕이 너무 좋았으므로 식물들은
과식을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된 것이다
악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여자의 노련함 때문에
한 개의 꼬리가 아홉 개의 꼬리로 둔갑한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여자는
그림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챈다
아스팔트에 내동댕이를 친다
자기 기억을 비워내기 위해
심장을 꺼내어 말리는 오후
자기 슬픔을 비워내기 위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헹구는 오후
여자는 혼잣말을 한다
왜 나는 기억이나 슬픔 같은 것으로도 살이 찌나
왜 나의 방은 추억에 불만 켜도 홍등가가 되나
늙어가는 몸 때문이 아니라
나이만큼 무한 증식하는 추억 때문에
여자의 심장이 비만증에 걸린 오후
드디어 여자는 코끼리로 진화했음을 안다
진화에 대해서라면 여자도 할 말이 있었다
한때 여자도 텅 빈 육체로 가볍게 나는
작고 작은 새 한 마리였으므로
이제 여자는 과거에 대해서만
겨우 할 말이 있을 뿐이다
* 눈물이라는 뼈 / 문학과 지성사, 2009. 11. 27.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은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그러곤 말로 뱉진 못했지만, 나는 이 말을 하고 있었다. 실은 우리는 유령이에요. 지금 보고 계시는 나는 내가 아니에요. 언제나 나는 내가 아니었고, 이런 뜬금없고도 근원적인 질문들이 던져졌을 때에 반가운 주인 나리의 발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대답을 하는, 지금 같은 순간만 나는 내가 돼요. 그 밖의 것들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단지 유령이에요. 오늘 하루를 어제 하루와 겹쳐서 살고 오늘 하루를 내일 하루와 포개어서 지나가는 헛것이에요. 과거에도 그랬구요.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내 대답을 듣고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은 시인을 이해했을까. 나는 과연 시인에 대해 이제는 이해하고 있을까. 시인은 어쩌면, 능력은 말소되고 기억만이 보존된 신이 아닐까.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고 그 누구의 기도도 경청할 수 없으며 그 무엇도 창조하지 못한다는 비애. 그러나 저만치 심원 너머에서는 어쩌면 한 번쯤은 그래본 적이 있었을 것만 같은, 이 아련한 손끝의 감촉들. 부재하는 능력과 존재하는 기억이 한몸뚱이에서 녹슨 뼈처럼 삐걱대는 소리를, 시인은 어쩌면 받아적는 중이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시인은 투명해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사라지는 사람. 그럼으로써 시인은 정확해지는 사람. 그렇지 않을까.
ㅡ 시집 뒷표지 글, <시인의 산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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