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화분 요람 [박후기]

초록여신 2009. 8. 30. 12:45

 

 

 

 

 

 

 

 

 

 

이 작은 화분이 요람이로구나

아버지는 구근식물이었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이불 밖으로 겨우 팔을 뻗어

촉촉한 겨드랑이를

말리곤 했다

 

 

어두운 방구석

이불에 눌린 아버지는

압착포 속에 갇힌 오징어처럼

쌀자루와 함께 점점

훌쭉해져만 갔다

시든 꽃잎이 몇겹

광대뼈에 들러붙었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고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암만 거울을 바라봐도

아버지 얼굴이 생각나질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덤 속에서도

빚 독촉을 받았다

죽음도 세상을 끝내지 못했다

 

 

 

 

*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2009.)

 

 

 

 박후기의 시는 새롭다. 소위 '미래차'의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게 아니라, 사물과 현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그만의 진지하고 신선한 눈이 있어서 새롭다. 그에게 있어 '기타줄은 기타의 핏줄'이며, '사과나무에겐 꽃 핀 자리가 똥구멍이다'. 묵을 먹으면서도 그는 '언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한국전통시의 본질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의 향기를 내뿜는 그의 시는 분명 한국현대시의 새로움의 향기다. 그 향기의 진원지는 바로 우리 삶의 비극이다. 그의 시는 비극의 주체성에서 피어난 슬픈 꽃이다. 그 꽃은 슬프지만 따스하고 아름답다. 그것은 그가 비극을 비극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비극적 황홀과 비극적 기쁨의 세계에 깊이 가닿아 있다. 손가락으로 비극의 바윗덩어리를 꾹 눌렀을 때 묵묵히 번져나오는 맑은 눈물의 진액, 그것이 바로 박후기의 시다. 그는 앞으로 한국현대시의 지평을 넓히는 중요한 시인으로 거듭날 것이다.

ㅡ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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