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철들 무렵 [정양]

초록여신 2009. 8. 8. 04:03

 

 

 

 

 

 

 

 

 

 

 

은행나무 줄줄이 서서

노랗게 눈부신 길로

늙은 내외가 걸어갑니다

길바닥에 깔리는 노란 잎새 사이

드문드문 떨어진 누런 열매를

발길 멈추며 줍기도 합니다

아직 잎새가 푸른 은행나무도

드문드문 서 있습니다

떨어질 열매도 없는 아직도

푸른 잎 무성한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나무도 수컷은 철이 늦게 드나보다고

할머니가 혼잣말처럼 두런거립니다

철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

못 들은 척하는 할아버지 대신

가을바람이 은행나무 푸른 잎새를

가만가만 흔들며 지나갑니다

 

 

 

 

* 철들 무렵 / 문학동네, 2009. 7. 27.

 

 

 

 

 

실수를 거듭하는 게 젊어지는 비결이라는 말을

사시장철 입에 달고 사는 친구가 있다.

이 세상에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실수도 많지만

다시 해보고 싶은 실수도 더러 있나보다.

삼 년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질 때마다 삼 년씩 더 살게 되었다는

민담 속의 동방삭 할아버지처럼

세상을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살자는 뜻이지 싶다.

사람살이가 한평생 헛것에 매달려 산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그 헛것에 매달려 사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인가.

 

 

 

실수를 거듭하지 않으려고 다짐하는 게 철이 든 건지

실수를 거듭하려고 벼르는 게 철이 든 건지

나로서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노라는 핀잔만 늘 내 몫으로 남는다.

 

 

하루하루의 날씨나 사계절이 사람들의 영원한 화제이듯

속절(俗節)들이나 이십사절기 같은 마디들도

우리네 쳇바퀴 돌리는 세월의 만만찮은 화두일 텐데

그 마디들을 거슬러보는 내 민화적(民畵的) 연출솜씨에

스스로 당황할 때가 많았다.

 

 

시집 낼 때마다 핀잔과 후회가 남지만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또 시집을 낸다.

오 년 전, 내 시집을 내고도 내 시집을 또 내는 문학동네도

아무래도 젊어지고 싶은가보다.

 

ㅡ <시인의 말>

 

 

.......

철들다는 말.

참 친근하기도 하다.

"철들 무렵"이라는 말의 속 깊은 뜻을 헤아려 보기에는 아직 살아온 날들이 짧기만 하다.

그래도 때로는 살아온 기준 이를테면 나이에 비해 가끔은 철이 들었다. 너무 넘쳐나 애석한 순간도 있었다.

돌아보면 아쉽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조화, 이치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은 포기와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여전히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단어를 잉태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 "희망", "긍정"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살아감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철들어질 것이다.

철들 무렵, 황혼이 찾아들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생의 끝나서야 그 철학적 이해를 얻게 될 지도...

이유야 어찌되든 이 <철들 무렵>은 우리의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의 아름다운 결말일 것이라고 마구마구 우겨대겠다.

아직은 철이 부족한 시기,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다.

(여전히 철을 거부하는, 초록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