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우리들의 진화 [이근화]

초록여신 2009. 7. 5. 21:31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기(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 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갈 수 있을까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 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 우리들의 진화 / 문학과지성사, 2009. 6. 24.

 

 

 

 새로 쓴 시가 먼저 쓴 시보다 더 '멋진'당신에게 배달되는 것은 아니다.

 

 

계단은 없다.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면.

 

 

아직 그 자리에. 지루하게 뭉개고 앉아서. 우리는 천국의 실험. 밝고 환한 쳣바닥이 쓰윽 우리를 핥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도 좋은가.

 

 

시집, 뒤표지 <시인의 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