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햇빛으로 들끓는 텅 빈 정적 속에서
모가지를 꺾고 툭툭 떨어지는 붉은 꽃들은
결코 네 얼굴이 아니다, 네 피가 아니다.
한여름 잎들의 샤워 꼭지에서 짙은 그림자를
쏟아 붓는 진초록 그늘이 한결 너답다.
머리카락 그림자를 깊게 빨아들인 너의 얼굴,
검푸른 수면에 무지갯빛 반짝이는 기름을
띄운 듯 너의 얼굴에 햇빛 조각들이
가볍게 떠돈다.
햇빛 조명이 정오의 적막함을 밝게 비추고
불붙은 뜨거운 공기 사이로
짙푸른 잡풀들이 몸을 비튼다. 온갖
날벌레들의 날개 소리만이 귓속에 가득해서
거기 너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나는 허공을
날갯짓도 없이 날아왔다.
저기 저 아래 바다 위에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내가 네 밑에 물결처럼 드러누웠을 때 덮은
출렁이는 너의 진초록 잎들 같다.
올려다본 하늘 바다에 별이 된 너의 섬들,
섬으로 떠 있는 너의 잎들.
네게서 멀리 떠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나는
열매처럼 너의 이름을 입안에 넣어본다
너의 맛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여름
나는 결코 너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겠구나
안녕, 나의 진초록들이여.
*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200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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