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여름 나무의 추억 [채호기]

초록여신 2009. 6. 21. 21:33

 

 

 

 

 

 

 

 

 

 

투명한 햇빛으로 들끓는 텅 빈 정적 속에서

모가지를 꺾고 툭툭 떨어지는 붉은 꽃들은

결코 네 얼굴이 아니다, 네 피가 아니다.

 

 

한여름 잎들의 샤워 꼭지에서 짙은 그림자를

쏟아 붓는 진초록 그늘이 한결 너답다.

머리카락 그림자를 깊게 빨아들인 너의 얼굴,

검푸른 수면에 무지갯빛 반짝이는 기름을

띄운 듯 너의 얼굴에 햇빛 조각들이

가볍게 떠돈다.

 

 

햇빛 조명이 정오의 적막함을 밝게 비추고

불붙은 뜨거운 공기 사이로

짙푸른 잡풀들이 몸을 비튼다. 온갖

날벌레들의 날개 소리만이 귓속에 가득해서

거기 너로부터 아득히 먼 곳으로 나는 허공을

날갯짓도 없이 날아왔다.

 

 

저기 저 아래 바다 위에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내가 네 밑에 물결처럼 드러누웠을 때 덮은

출렁이는 너의 진초록 잎들 같다.

올려다본 하늘 바다에 별이 된 너의 섬들,

섬으로 떠 있는 너의 잎들.

 

 

네게서 멀리 떠나왔을 때, 나도 모르게 나는

열매처럼 너의 이름을 입안에 넣어본다

너의 맛을 모른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여름

나는 결코 너의 이름을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겠구나

안녕, 나의 진초록들이여.

 

 

 

 

 

* 손가락이 뜨겁다, 문학과지성사(2009. 6.)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패랭이꽃 [송찬호]  (0) 2009.06.23
나팔꽃 우체국 [송찬호]  (0) 2009.06.23
뜨거움 [정일근]  (0) 2009.06.21
외등 [정일근]  (0) 2009.06.21
하회에서 안다 [정일근]  (0) 2009.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