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무렵에 나는 해남이라는 지명을 퍽이나 동경했었다
거기, 바다가 시작되는 어느 산기슭에 땅끝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내 스무 살은, 시작과 끝이 한 뒷골목에서 함께 건들거렸던
누구라도 주워서 그을 수도 있었던 깨진 병 같은 시절이었다
마흔 살 무렵이 가까워 오자, 나는 혼자서 여수에 가고 싶었다
마흔 살 무렵이 가까워 오자, 나는 혼자서 여수에 가고 싶었다
내리막길이 끝나가는 허름한 점방집 유리문 같은 것에 대고
곧장 여수를 향해 가는 길을 묻고 싶었다
쑥부쟁이 닮은 주인집 여자가, 왔던 길 쪽을 향해 손사래를 치켜들고
한참이나 도라 도라 도라, 도리질을 쳐주어도
나는 실상 그 길을 되짚어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의 방식으로
지명들을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었을 파란만장의 내재율을
가만히 어루만져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 시에 2009년 여름호, 시와에세이
.......
나의 스무 살, 난 강원도 두메산골을 떠나 그야말로 대도시로 탈출했다.
대구에서의 12년은 내 청춘의 황금기였다.
사랑의 정점을 달렸으며, 사랑의 깨짐 또한 몸소 느꼈다.
서른을 넘어서며 또 다시 뜻하지 않은 서울행을 감행했다.
나를 벗어난 내 삶의 또 다른 전환기로의 이동이자 참회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마흔을 앞둔 요즘은 또 다른 지명으로의 여행을 시도하려는 중이다.
지명 속에 포함된 내 초록의 내재율 또한 나를 성숙시키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강원도는 영원한 내 무덤이 될 것이고,
내 숨결과 흔적과 청춘을 바친 지명들은 내 삶의 이동경로이자 삶의 뼈대가 되었음에 감사한다.
또 어딘가로의 예정된 지명으로의 여정 앞에서
흔들림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 지명이 주는 즐거움을 먼저 사랑하고자 함일 것이다.
(지명이 주는 즐거움 앞에서,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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