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란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들은 바람의 목구멍 깊이 울고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닌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한 전생이 저 나무의 한 잎이었을 터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ㅡ 『시인시각』(봄호)
"얘들아, 이 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단다. 그래서 이름을 '자작나무'라고 부르지."
백발이 성성한 숲해설가 할아버지의 설명에 5학년 아들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선다. 자작나무는 열매가 안 열리는가? 사과나무나 감나무는 열매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왜 하필 자작나무는 '자작자작' 타는 소리에 나무 이름을 붙였지? 아들의 엉뚱한 질문에 일순 당황하면서도 자작나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그 때 부터였던 것 같다. 남쪽지방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자작나무 숲이라 어떤 날은 백두산을 둘러싼 순백의 자작나무 숨소리를 듣는 꿈을 꾸었고, 간혹 유명한 사진작가가 폼나게 담아온 바이칼의 맑은 물과 호수 수면에서 고요히 흔들리는 그 위상을 보기만 해도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커졌었다.
얼마 전 최정란 시인의 「자작나무 사원」을 만났을 때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달음에 닿는 흰 말들'의 이미지가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이 지닌...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을 거쳐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이어졌을 때 묘한 흥분이 일어났다. 오래 전 막연히 달빛 고요한 강가에서 자작나무를 밤새 태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희디 흰 나날들'을 보러 바이칼로 떠나버릴까, 자작자작 타버린 그의 몸의 일부를 벗겨내어 천마도를 그려볼까 하는 강렬한 동경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최정란 시인이 세원 호은 '자작나무 사원'을 읽으며 시인의 특별하고 예민한 감각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늘 순백의 자작나무 주변을 돌며 겉모습에만 치우친 내 '마음의 시베리아'가 울리고 있음을 느낀다.
2007년도 시인의 첫 시집 「여우장갑」에서 보여주었던 도회적이고 디지털적이었던 시심과 차분한 열정이 흔들림 없이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에 동참하고 있음이 보인다. 시는 시인을 닮아 젊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끊임없이 '자작의 묘목'을 심으며 스스로 담금질 할 줄 아는 시인이 '최정란'이다.
(오자영 / 편집위원)
* 미네르바 2009년 여름호, [리뷰, 시단평] 중에서
.......
신화로 만나는 중국 이야기
원래는 온통 하얗던 땅이 흰구름 공주가 뿌린 가루 때문에 갈색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신비롭지 않나요? <반짝반짝 빛나는 흰구름 공주>는 중국 북쪽 지역의 소수 민족인 만주족 신화예요. 만주족이 살던 만주 지방은 겨울이 매우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에요. 또 키 큰 자작나무 숲이 넓게 펼쳐져 있지요. 오래전부터 만주족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흰구름 공주 신화는 하얀 눈과 자작나무와 어울려 한층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들린답니다. 신화는 이처럼 자연환경과 어우러져서 사람들과 함께 항상 살아 있지요.
혹시 홍수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흰구름 공주 이야기가 <철렁철렁 물을 다스린 곤>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맞아요. 흰구름 공주 이야기는 황제의 보물인 식양을 훔쳐서 물을 다스렸던 곤 이야기의 만주족 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처럼 지역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은 것을 보면, 넓은 중국 땅에 사는 다양한 민족들의 생활과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답니다.
이제 눈 내리는 자작나무 숲에 서면, 어디에선가 "돌아가지 않아요."라고 외치는 흰구름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지 않나요?
ㅡ 교원, [솔루토이 한자동화 - <반짝반짝 빛나는 흰구름 공주> 중에서 발췌.
신화로 만나는 중국 이야기에서 자작나무의 전설을 떠올려 봤답니다.
아버지 천신이 인간세계가 시끄럽다고 비를 엄청 내렸다고 하네요. 몇날 며칠 비가 내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 딸 중 막내인 '흰구름 공주'가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천신인 아버지 몰래 식양을 훔쳐서 인간세상에 뿌리자 그 갈색가루가 홍수로 난리였던 인간세상을 갈색으로 만들었다 합니다. 천신인 아버지가 노발대발 화를 내자, 흰구름 공주는 인간세상으로 도망을 쳤답니다.
천신인 아버지는 비와 바람, 우박과 번개 신들을 불러 들판에 눈을 퍼붓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매서운 눈바람에 꽃 들이 모두 얼어 죽으면 공주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눈이 펑펑 쏟아져 온 들판을 덮어도 흰구름 공주는 보이지 않았답니다. 언니들이 막내에게 이제 그만 돌아와 잘못을 뉘우치라고 했지만 흰구름 공주는 '아저비, 저는 사람들을 도운 것이 자랑스러워요. 아버지가 저를 인정하기 전에는 하늘로 돌아가지 않아요'라며 버티었다 합니다. 슬픔에 잠긴 천신은 온 세상을 눈 내리는 추운 겨울(冬)으로 만들어 버렸다지요. 펄펄 소리 없이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흰구름 공주는 점점 자작나무로 변해갔다고 전하네요.
자작나무로 변해버린 동생이 가여워 낮에는 해 공주가, 밤에는 달 공주가 찾아와 햇빛과 달빛을 뿌리며 위로해 주어서 그 빛을 받은 자작나무는 오래오래 은빛을 반짝반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듯 하지요...
자작나무의 꽃말이 <당신을 기다립니다>라네요. 여기에서 당신이란 아버지 천신일 수도 있겠고, 흰구름 공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재미있나요? 시를 통해 신화를 알아가는 것 또한 색다른 맛이 있네요.
<자작나무 사원>을 다시 읽어보세요.
그리고 <흰구름 공주>를 불러 보세요.
반짝반짝 빛을 뿌리며 우리에게 자작나무 숲을 보여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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