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던 삼선교회엔 유난히 숙이 많았죠
은숙(恩淑)이, 애숙(愛淑)이, 양숙(良淑)이, 현숙(賢淑)이, 경숙(京淑)이, 남숙(南淑)이, 난숙(蘭淑)이, 미숙(美淑)이, 정숙(貞淑)이......
그야말로 쑥밭이었죠 제일 믿음이 좋았던 애는 은숙이,
애숙이는 잠시 나를 사랑했고
양숙이와 현숙이는 정말로 현모양처가 되었죠
경숙이는 지금도 서울에 살지만, 남숙이는
먼 데로 이사 갔답니다
난숙이는 청초했고 미숙이는 예뻤는데
지금도 제일 기억나는 애는 정숙이에요
어렸을 때 귤껍질 넣은
뜨거운 주전자 물을 뒤집어썼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던 아이,
그러던 어느 성탄절에 성극을 하다가
두건과 함께 가발이 홀랑 벗겨진
울지도 않고 끝까지 마리아 역할을 하고는
그 길로 교회를 떠난 아이, 지금도 어디선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거지꼴을 한 동박박사들을 기다리는 거나 아닌지요
* 마징가 계보학,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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