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오라 했음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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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서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2001년 「시와 시학」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가 있다.
* 여우 / 문학동네, 2009. 3. 12.
편지봉투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기어나와 화자를 물어버린 '전갈(scorpion)'은 어느새 '전갈(message)'로 그 몸을 바꾼다. 그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린 후로 화자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웃거나 열병을 앓는다. 그 병인(甁因)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이 보낸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에 있지만, 이제 전 생을 다하여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준비해야 하는 화자는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사루비아 씨앗을" 봉투에 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편은 '全蠍/傳喝'의 언어유희(pun)를 바탕으로 사랑이 가져다주는 비애와 기다림의 이중주를 아름답고 아리게 노래한다. 감각의 구체와 상상적 미감을 통해 사랑의 간절함과 상처를 잔잔하게 보여준 것이다.
ㅡ해설[감각의 묵시록] 중에서 발췌,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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