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물에 얇은 살얼음이 끼는 立冬
아침에 집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 두 개가
저녁에 나가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병색 짙은 벤자민을 쏟아놓고 화분만 쏙 빼 가져간 것,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이다
아직도 간장을 달여 먹다니!
그렇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둘쯤은 있을 터
검정 고양이가 아직 불켜지 않은 거실을 가로질러가는
多數의 저녁이
침울하게 지나간다
*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세계사(2001)
...
이 시에는 세 개 정도의 장면이 병치되어 있다. 아침에 집 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이 저녁에 나가보니 화분만 사라져버린 사건과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풍경, 그리고 검정 고양이가 저녁의 거실을 가로질러가는 순간의 묘사가 그것이다. 얼핏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들이고 다만 <저녁>이라는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시의 계절적 배경은 <얇은 살얼음이 끼는 立冬>이다. 겨울의 초입은 모든 생명체들을 긴장시키고 약한 것들은 시들어가게 만드는 시련을 예고하는 기간이다. 시인은 집 안에서 시들어가는 벤자민을 살려보려고 집 밖으로 내놓는다. 그런데 저녁에 나가보니 병색 짙은 벤자민은 빼고 화분만 사라졌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솔직한 편의주의가 아닐 수 없다. 병든 생명을 버려두고 필요한 물건만 빼가는 영악한 세태를 절감하고 있는 터에 어디선가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요즘에도 그 수고로운 공정을 거치면서 간장을 직접 달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아직 죽지도 않은 생명을 버리고 화분만 빼내어 달아나는 약삭빠르고 속악한 편의주의와 집에서 간장을 달이는 지난 시대의 삶의 방식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지금은 <달이다>라는 말이 사라져가는 속도와 편의 위주의 시대이다. 달이는 것은 천천히 묵묵히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다. 오랜 시간에 걸친 <발효>의 신비로운 변화를 준비하는 과정 역시 더디고 힘겨운 것이다. 그렇게 수고롭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둘쯤은 있나 보다고 시인은 씁쓸하게 말한다. 그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속도전의 시대에서 사라져가는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처연해져 집 안으로 들어온 시인은 어두침침한 거실을 가로질러가는 <검정 고양이>를 목격한다. 운명을 예고한다는 검정 고양이의 출현에 그는 인생의 저녁을 맞이하고 있는 자신의 미래를 침울하게 예감한다. <달이기>의 수고로움과 <발효>의 지혜가 잊혀져가는 시대에 오랜 시간을 견디며 저녁을 맞은 세대들은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또다시 침통한 시간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이 시를 단순한 세태 묘사에서 넘어서게 한다. 하루 저녁의 단편적인 인상들을 의미 있게 연결시켜 이만한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상당부분 연륜의 힘이라 할 만하다. 그 역시 자신의 생을 달이는 고독의 시간을 견디면서 깊은 사색의 침전을 얻어왔던 것이다.
ㅡ<해설>, 이혜원(문학평론가) [낭만적 영혼의 저녁풍경] 중에서 발췌.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상의 방 한 칸 [안도현] (0) | 2009.03.10 |
---|---|
목련에 기대어 [고영민] (0) | 2009.03.10 |
처음 가는 길 [도종환] (0) | 2009.03.09 |
봄 비 [안도현] (0) | 2009.03.09 |
빛의 사서함 [박라연] (0) | 2009.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