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은 나무의 수많은 눈꺼풀
둥치가 바람에게 말을 걸고 나무의 기억이 흔들린다
기억 몇 잎 떨어진다 해도 한 뼘 그늘을 개의치 않을 나무
잃어버리다, 잊어버리다
잠든 당신의 눈꺼풀에 반달이 내려앉으면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외운다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꼭 두 개의 잎을 갖는 슬픈 種
눈꺼풀을 떠나보낼 때의 나무는
새로 돋아날 後生의 잎들을 이미 깜박이고 있을 텐데
다만 몇 잎의 기억, 후두둑 강물 위로 떨어진다면
물 위로 흐르는 눈꺼풀의 변주에 오래 귀 기울일 뿐
물에 관한 나무의 기억이란, 내 몸의 수액이 나이테를 돌아 당신에게 가 닿는 이치
잠든 눈꺼풀에 눈꺼풀을 포개어보는 일
몸에 푸른 물이 들어도 좋겠지만 우리는 식물이 아니어서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잘라냈다는 어느 방랑
또한 잠들지 않기 위해 잎을 떠나보내는 나무처럼
당신은 내 검은 안구마저 지우는 黑點의 시간일 것
언젠가 눈꺼풀의 떨림으로 오는 당신의 안부를 맞겠다
기울지 마, 기울지 마
나무의 그늘에게서 빌려온 긴 소절을 다 외우기도 전에
텅 빈 나뭇가지에 걸릴 반달의 눈꺼풀
(현대시 11월호)
*2009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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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2006년 《국제신문》, 2008년 《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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