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꽃과 저녁에 관한 기록 [고영민]

초록여신 2009. 1. 20. 12:52

 

 

 

 

 

 

 

 

 

 노을이 붉다. 무엇에 대한 간곡한 답례인가. 둑방에 매인 염소 울음소리가 하늘 끝까지 들렸다. 배롱나무 가지엔 꽃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백일 동안 붉게 핀다는 이 꽃은 언제 처음 이 가지 끝에 달렸을까. 문간에 앉아 담배 하나를 피워 물고 가늘게 눈을 찌부리며 꽃의 처음을 생각했다. 저 꽃은 자신의 진분홍이 내내 설렜을까. 하루하루 지워나가는 백일의 생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잠들지 못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끝물의 꽃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하지만 그 기억도 이젠 곧 희미해질 테지. 파밭 사이로 그때나 지금이나 지루한 몇채의 함석집이 놓여 있고 미루나무가 서 있고 둑방 너머의 갯벌 한쪽 염전에는 삐그덕, 수차를 돌리는 검은 씰루엣이 보일 뿐이다. 더 어두워지면 그도 저 둥근 쳇바퀴를 내려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에게도 오늘 이 하루 등뒤에 고스란히 남는 것은 살아버린 꽃이 저녁 바람 속에 한 숭어리로 진다. 그리고 풍경의 어떤 것도 그 떨어진 꽃을 다시 줍지는 않는다. 울음 소리로 보아 멀리 논에서 놀던 오리들이 이젠 제집으로 가고 있다

 

 

 

 

* 공손한 손,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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