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고통을 달래는 순서 [김경미]

초록여신 2009. 1. 3. 14:09

 

 

 

 

 

 

 

 

 

토란잎과 연잎은 종이 한장 차이다 토련(土蓮)이라고도 한다

 

 

큰 도화지에 갈매기와 기러기를 그린다 역시 거기서 거기다

 

 

누워서 구름의 면전에 유리창을 대고 침을 뱉어도 보고 침으로 닦아도 본다

 

 

약국과 제과점 가서 포도잼과 붉은 요오드딩크를 사다가 반씩 섞어 목이나 겨드랑이에 바른다

 

 

저녁해 회색삭발 시작할 때 함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거나 한송이 꽃을 꽂는다 미친 쑥부쟁이나 엉겅퀴

 

 

가로등 스위치를 찾아 죄다 한줌씩 불빛 낮춰버린다

 

 

바다에게 가서 강 얘기 하고 강에 가서 기차 얘기 한다

 

 

뒤져보면 모래 끼얹은 날 더 많았다 순서란 없다

 

 

견딘다

 

 

 

* 고통을 달래는 순서 / 창비, 2008. 12. 29.

 

 

 

.......

 

 김경미의 이번 시집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것은 '사랑의 나체'이다. 사랑의 근거 없음, 맥락 없음, 혼선, 과오, 거짓, 시늉 따위들이 명멸하는데, 그것들은 또한 삶 전체의 초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붓놀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천성으로 보이는 어떤 '방임'ㅡ규정하고 속박하는 개념적, 관습적 테두리에 갇힐 수 없는 영혼의 방임ㅡ의 반경을 넓히는 행보이다. 그 행보 속에서는 물론 살맛이나 즐거움뿐만 아니라 상처와 낭패감으로 인한 괴로움이 들어 있겠으나, 거기에는 무슨 저울질을 넘어서는 불가항력의 지향이 있고, 그러한 것은 인간이 다소간에 공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고생대 은행잎 화석사진과 내 위벽에 찍힌 당신의 말투"(「조금씩 이상한 일들1」)"부러진 검정 우산 젖어 종일 접히지 않던 검은 눈동자(「고요에 바치네」)"가을밤 국화 줄기같이 밤비 내리는데"(「인간론」)같은 구절에서 시는 반짝인다.

ㅡ 정현종(시인)

 

 매일매일 사태가 나는 삶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인가. 태생적으로 인간임을 슬퍼하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 시인인가. 어느 저녁에 방향과 중심을 잃고 통곡하는 마음의 소리를 마음으로 받는다. 인간사의 간극을 어쩌지 못하고 숨결조차 촘촘히 아픈 그의 시 앞에서 그만 무릎을 모은다. 누가 이 생에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그날의 배경」)몰라 머뭇거리는 생, 그 생은 이 생과 다정하게 겹혀진 것이다. 세상이 "수상한 것만 빼면"(「멸치」) 그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시의 혀, 고약한 과오들을 따뜻이 덮어주는 시의 손목. 그의 발성이 값지고 높으며 또한 이토록 간절한 것은 그가 인간의 숲에서 스밀까말까 하며 파도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인간론'이며 드물게 다정한 사람 정원의 시론이어서 참 어쩔 수 없이 목이 메어진다.

ㅡ 이병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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