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불
1억 5천만km를 날아온 불도 엄연한 불인데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 타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는데
그 사랑을 다음 생까지 운구(運柩)할 길 찾고 있는데
빨간 알몸을 내놓고
아이들은 한나절 물속에서 마음껏 불타네
누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렇게 미치는 것이 옳겠지
저 물결 다 놓아 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水量),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 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 하랴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빠져 죽는 타서 죽는
물불을 가려 무엇 하랴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 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고
숨져 가며,
나아가고 있었다
유지를 받들 듯,
산 나무들이 죽은 나무들을 인정해 주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는 생사의 양상이 바뀌어
고사목들의 희고 검은 자태가 대세를 이룬 가운데
슬하엔 키 작은 산 나무들 젖먹이처럼 맺혔으니,
죽은 나무들도 산 나무들을 깊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상봉에서도 쉼 없이 상봉 중인 것
여기까지가 삶인 것
죽지 않는 몸을 다시 받아서도 더 오를 수 없는
이곳 너머의 곳, 저 영구 동천에 대하여
내가 더 이상 네 숨결을 만져 너를 알 수 없는 곳에 대하여
무슨 신앙 무슨 뿌리 깊은 의혹이 있으랴
절벽에서 돌아보면
올라오던 추운 길 어느 결에 다 지우는 눈보라,
굽이치는 능선 너머 숨죽인 세상보다 더 깊은 신비가 있으랴
독방
혼자 있는 것이 행복하다고
나는 믿었지만
행복 속에 안녕이 없네
나는야 뭉게구름 같은 숲 가녘에
안내인마냥 외따로 선
키 큰 소나무 한 그루 사랑했지만,
그 나무 오징어 다리 같은 뿌리 내놓고 길게 쓰러졌네
혼자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자
무엇이든 저지르고 마는 자이네
그의 몸은 그의 몸 이기지 못해
일어나지 않는 몸,
기필코 자기를 해치는 몸이네
이 독방에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독방
현관문 열고,
방문 열고 들어서면
더 들어갈 데가 없는 곳에
그러나 더 열고 들어가야 할 문 하나가 어디엔가
반드시 숨어 있을 것 같은 곳에
쓰러지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기어 다니지 않아도 되는
더 단단한 독방 하나, 나는 믿었지만
그 꿈 같은 감옥
불 켜면 빛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 타는 듯한 벌판에서 눈 감는 사람은
또 다시 문 밖에 누워 잠드는 사람이네
현기증
마흔, 어디선가 누가 지금 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고뇌에 찬 결단이기를 빈다
밥 먹다 말고 화장실 갔다 와서
다시 숟가락 집어드는 사람은 지금 제 인생이
너덜너덜해졌다고 깊이 느꼈다, 느꼈을까
내면이란 게 상(傷)하게 되어 있는 거지만 그곳으로
먹는다는 건 안으로 토한다는 것, 근데 왜 멎질 않지
흉터를 몸에 남기고 간 것들조차 믿을 수 없고
머리가 빠진다, 사람 같지 않던 그 독재자처럼
아니 그자와는 아무 관계없이 온 미래일 뿐이다
미래란 늘 난장판이었지만
미래라고 하면 두근거리며 현관에 다가선 발소리가 떠오르지만,
내가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걸 보면
나에게도 분명 노후가 있을 것이다
죽음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쉼 없이 중얼거렸던 자는
무시무시한 방랑과 영웅적인 은둔에 대해
약간 병적인 선호를 가진 자,
누가 광인보다 더 진실되겠는가
누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칩거한 자의 말을 듣겠는가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반드시 우릴 후회하게 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건 이미 실패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세상에 적개심을 가져선 안 돼
누구의 세상도 아니니까
나는 어떻게든 무사히 여길 빠져 나가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모두가 떠난 듯한 곳에서
114 안내원은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별안간 고백했다
사랑은 도처에서 좀비처럼 나타난다
그건 언제나 정신이 좀 없지
하지만 사랑을 사랑해
시는 시인을 죽인다는 말 가지고는 이제 행복해지지 않아
날 갖고 더는 실험하지 않을 거야
나가려면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당신이랑 같아."
자백에는 자백 몰래 끼워 넣은 유언(遺言) 냄새가 나지
저 티브이가 내게 뭔가를 끊임없이 개인 교습하듯
테이크 다운 이후의 그라운드 공방에서 포옹한 두 격투가는
연애하는 자세로 죽어라 치고받고
제 신(神)에게 제 나라를 부동산으로 바치려는 자가 파안대소하고 있고
터미네이터는 소방차 앞에서 재난 선포나 하고
그리고, 느닷없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난 하프타임의 치어걸들을
나는 멍한 눈으로 본다
그래도 사는 것에는 사는 것 이상(以上)의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구름모자 쓴 15층 옥상 위로 섬광처럼 새들이 날아갔다
수치심으로 빨갛게 몸을 데우는 저녁나무 밑에는
너무 가까워 폴짝, 뛰어내리고 싶은 지상(地上)이 있다
비닐 같은 비늘을 벗어 놓고 어마어마한 짐승이 지나갔을 것이야
그러한 뿌연 공기 사이로,
또 그러한 현기증 사이로
개를 안고 비비고 핥으면서 식후의 여자들이 지나간다
제 몸으로 그것을 낳기라도 했다는 듯
그러나 이것은 다만 휴일의 흐릿한 풍경 풍경
커튼을 내리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애들은 절대로 미치지 않아요
출혈하고 돌아온 몸이 뭔가를 토하려고 다시
털썩, 식탁에 주저앉았을 때부터
너무 멀고 어지러운 바깥을 향해 나에게는
약간의 연기(演技)가, 이를테면 고요한 몸부림이 필요했다
아무리 더러운 것도 만지고 빨고 껴안고 싶은 순간이 온다
술잔에 물든 사양(斜陽) 흔들리다 꺼지면
창밖의 어둠,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온다
시인들
어딘가 아픈 얼굴들을 하고 시인들이 앉아 있다
막 입원한 듯 막 퇴원한 듯 위중해도 보인다
암 투병 중인 여류시인 문병 갔다가 걸어서 연말 술자리에 갔더니
울긋불긋한 선거 현수막이 만장같이 나부끼더니
얼음장 아래 모인 한 됫박의 마른 물고기들처럼
오직 시인들끼리, 시인들이 모여 있다
자리에 앉았는데도 멀리 떠난 얼굴을 한 아픔도 있고
어디든 너무 깊이 들어앉아 칼끝처럼 자기를 잊은 아픔도 있다
면도로 민 머리에 예쁜 수건을 쓴 마른 몸이 생각났다
젖과 자궁을 들어내고 젊은 죽음 냄샐 풍기는 몸들이 생각났다
아픈 그녀의 자리는 여기 없고,
그녀는 이곳보다 더 춥고 어두운 들판을 걸어가고 있고, 시인들이
이름 부르면 끌려 나가야 할 인질들처럼 모여 있다
많은 것을 버렸는데도 아직 더 버릴 게 있다는 얼굴들이다
별로 얻은 게 없는데도 별로 얻을 게 없다는 표정들이다
시인들은 영원히 딴 곳을 보고 있다
무섭게 아프고 무섭게 태연하다
간혹 한눈팔지 않는, 사촌 같은 아픔도 끼여 있는데
병을 흉내 내는 것이 더 큰 병임을 알기에
모르는 척 속은 듯 함께 앓아 넘기기도 한다
나는, 여기 머물면서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이상(異常)한 것에 정신없이 끌리는 사람들이 좋다
제가 아픈지 안 아픈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좋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좋다
마음 가난과 어지러움은 면허 같은 것이니 길이 보전들 하시되
내년에도 몸이나, 어떻게든 몸 하나만은 잘들 보살피시라고
나는 조등(弔燈)처럼 노랗게 취하며 기원했다
얼음 물고기들이 순한 주둥이를 뻐끔대며 옹송그리는
차디찬 환영이 나무 벽 위로 자꾸 지나갔다
진통제를 꽂고도 시 읽고 시 읽어 달라던 안 아픈 영혼,
아직 시집 한 권 낸 적 없는 그녀 생각이 났다
* 노작문학상 수상작품집(이영광 ㅡ 노작문학상 제8회 수상시인) / 노작문학상 운영위원회 엮음, 동학사.2008.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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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의 시가 읽는 이들의 가슴에 울림의 파장과 결로 다가왔던 것은 그만이 지닌 독특한 비장미(悲壯美)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에서 과장과 애상(哀傷)과 탄식 또는 영탄으로 빚어진 비장미의 것들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영광의 비장미는 그러한 것들과 류(類)를 달리하고 있었다. 특히 만들기의 시들이 지니는 난삽과 혼미, 해학이 아닌 작위의 천박한 말부림이 시에 미만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 그 그건없는 <난경(難經)>에 강직한 유연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길을 트는 진정성에 나는 크게 호감을 느끼면서 그이 시들을 읽었다.
ㅡ 심사위원 정진규
이영광은 의미 없는 세상에서 어떤 처연한 운명을 그늘처럼 예감해 온 시인이다. 나로서는 최종적으로 중견 이재무와 신진 이영광 두 시인을 놓고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두 시인 모두 수상자가 되기에 흠이 없다. 하지만 같이 심사한 세 명 심사위원이 앞선 토론에서 이영광을 모두 추천했기에 그를 수상자로 결정했다. 이번 수상자 결정은 이 상의 신선함을 보태주는 동시에 이영광 시인의 앞날을 주목하게 해줄 것이다.
ㅡ 심사위원 조정권
이번 수상작이 된 「물불」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어쩔 수 없이 금생(今生)의 전부라는 듯 자책과 한탄으로 스스로의 불우를 고백하는데, 그 노골(露骨)에는 단지 일회적인 삶이라도 힘겹게 탕진해야 하는 고단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리하여 햇살이 그늘을 거느려 물비늘로 흩어질 때 더 찬연한 것처럼, 무모한 삶을 호수 속 깊이 꺼꾸려뜨리는 이 자진(自盡)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절제나 유비의 벽을 뛰어넘어 심금에 얹히는 진솔하고도 깊은 감동의 수사(修辭)를 마련해 보이는 것이다. 어쩐지 고전적인 그의 어법은 더러 메마르고 세련되지 못한 소박함으로 나타나는데, 그러나 진정이 읽혀지는 만큼 굳고 강건한 감동으로 오롯하다. 음미하는 시보다 풀어내는 수사가 번거로운 시의 세태에, 그만의 특장을 갖고 있다는 그 자체가 미덕이기도 할 것이다.
ㅡ 심사위원 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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