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생의 절반 [이병률]

초록여신 2008. 10. 22. 18:42

 

 

 

 

 

 

 

 

한 사람을 잊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이 사는 데 육십 년이 걸린다 치면

이 생에선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되나니

 

 

당신이 살다 간 옷들과 신발들과

이불 따위를 다 태웠건만

당신의 머리칼이 싹을 틔우더니

한 며칠 꽃망울을 맺다가 죽은 걸 보면

앞으로 한 삼십 년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데

꼬박 삼십 년이 걸린 셈

 

 

이러저러 한 생의 절반은 홍수이거나 쑥대밭일진대

남은 삼십 년 그 세월 동안

넋 놓고 앉아만 있을 몸뚱어리는

싹 틔우지도 꽃망울을 맺지도 못하고

마디 곱은 손발이나 주무를 터

 

 

한 사람을 만나는 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고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일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詩다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정 [이병률]  (0) 2008.10.22
전생에 들르다 [이병률]  (0) 2008.10.22
이동 [정영선]  (0) 2008.10.22
동충하초(冬蟲夏草) ....... 정영선  (0) 2008.10.22
잠자는 사과나무를 읽다 [정영선]  (0) 2008.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