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 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 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 2008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ㅡ 수상작 중에서, 중앙일보.중앙books.
「가을」은 전통적인 감각과 언어로 가을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미당 선생이 지녔던 언어의 마술을 다시 한번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분위기와 어조에는 백석의 느낌도 있다. 장난기와 천진함도 있다. 또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소리와 운율의 미학이 특별한 수준에서 성취되어 있음도 매력적이다. 그래서 대가大家의 옛날작품을 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은 복고적인 작품이다. 「가을」속의 가을은, 오늘날 비현실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실이 상실한 미학을 복원해 보여준다. 해체와 잡종과 금속성의 21세기 전자시대에, 「가을」이 보여주는 복고적 감각과 언어 미학은 뜻밖의 전위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송찬호 시인은 무거운 형이상학적 사유 대신에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를 추구하고 있다. 「가을」은 그 가운데서도 수작이다. 「가을」에서 멋지게 구현된 '명랑한 옛날식 언어유희'는, 사이버 세상에 대한 유쾌한 반란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ㅡ 심사위원(김혜순. 문인수. 이남호. 이시영. 황현산 / 대표 집필 이남호), 심사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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