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사랑의 (무거운) 신호 [이병률]

초록여신 2008. 10. 16. 13:19

 

 

 

 

 

 

 

 

 

 채팅하다 대뜸 전화번호를 묻는 한 여자아이 전화 걸어 같이 살 수 있냐고 묻는다 밥하고 빨래해주고 그러겠다 한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사랑해라고 다섯 번 말해달라 한다 얼굴도 보지 않은 아이 상관없어요 분명 아저씨가 날 사랑할 거니깐 나도 아저씨를 사랑할 수 있어요 그건 일도 아니에요

 

 

 창 밖에는 가랑비 내리고 문득 한낮이라는 사실이 무겁고 아프다 비를 피한 매미 담벼락 어딘가에 붙어 슬핏슬핏 우는 소리 들리고 눅눅한 마음에 달라붙은 벌레 몇 마리를 집어 재떨이에 옮긴다 아저씨 변태 아니죠 여기는 보수적인 데라 아저씨랑 팔짱 끼고 다닐 수가 없어요 아저씨 나한테 뭐 해줄 건데요 같이 한 방 사는 친구들이랑 수영하러 갈 거라는 여자아이 묻지도 않았는데 재잘재잘 새처럼 소리 높여 술장사가 꿈이란다 수영하러 바다로 가는 거니

 

 

 진주에 사는 아이가 서울엘 올라오겠다 한다 하루 종일 암말도 않고 입만 맞추겠다고 한다 난 멀리 사는 사람이 좋아요 하룻밤 재워줄 수 있어요? 집에는 한방 가득 지린내 나는 옷더미 책더미에 책상 두 개나 차 있고 나머지 한 방에는 달랑 나 혼자 누울 침대밖에 없으니 두 개 방이어도 오란 소릴 못 한다

 

 

 다시 누군가를 집에 들인다는 일이 상처가 된다는 것쯤은 안다 바람 잦은 밤이면 내 집 또한 앓는 소리를 낸다는 것쯤 모르지 않는다 몇 시간을 나갔다 돌아왔더니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두 개의 메시지 얼굴도 모르는 아이 환멸이란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주사는 그 아이 달랑 전화번ㅇ호만 들고 서울 올라가는 버스를 탔노라 했다

 

 

 

 

*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