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나의 자작나무 [강신애]

초록여신 2008. 9. 8. 12:02

 

 

 

 

 

 

 

 

 

 

당신은 언제부터 자작나무 숲에 살았나요

제가 부를 때 당신 대답은

자작나무 숲을 돌아나오는 피리소리였나요

당신은 저를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당신 살결은 은잔처럼 눈부시고

맨발은 흰뱀처럼 보드라워

그 아래 양귀비꽃들도 아득히 눈감고 머리 숙입니다

저녁이면 자작나무 이파리는, 연기가 뿌옇게 올라오는 숲에

긴 머리칼을 기대고 手淫합니다

긴장이 빠져나간 이파리는 순결해지고

당신은 촘촘한 흰 피륙으로 꿈을 덮습니다

자작나무를 잠재우고 자작나무 숲을 들어올리는 당신은

자작나무의 정령,

제게 보여주신 수천 길 폭포의 현란한 추락과

비상하는 새떼의 날갯짓은 연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탁발하며 저는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 속에는 아직 터지지 않은 씨방이 있어

당신 숲 가까이 씨앗을 날려보냅니다

과거 따윈 갖고 싶지 않은 당신 몰래

내가 낳아 기른 자작나무 한 그루

나는 이제 나의 자작나무에 기대어 삽니다

 

 

 

 

* 서랍이 있는 두 겹의 방, 창작과비평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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