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그늘의 발달 [문태준]

초록여신 2008. 7. 30. 09:46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감나무가 너무 웃자라

감나무 그늘이 지붕을 덮는다고

감나무를 베는 아버지여

그늘이 지붕이 되면 어떤가요

눈물을 감출 수는 없어요

우리 집 지붕에는 폐렴 같은 구름

우리 집 식탁에는 매끼 묵은 밥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 그늘의 발달 / 문학과지성사, 2008.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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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광호(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

 

그늘은 육체적 공간을 가진 모든 존재가 거느리는 것이다. 몸이 있기 때문에, 공간을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늘이 생긴다. 하나의 그늘은 다른 하나의 그들이고, 그늘과 그들은 그렇게 만나고, 그늘은 그렇게 발달한다. '그늘ㅡ되기'는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한 몸의 그늘/그늘의 발달"이라는 존재인식이 만들어낸 몸짓이다. 감나무의 그늘은 그래서 지붕의 그늘. 우리 집의 그늘, 나의 그늘이 된다. 그러면 그늘을 노래하는 화자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밤을 다 감고/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하는 존재. 그래서 이 시는 "잠시 꿔 온 빛"으로 쓰여진 그늘의 일기이다. 그늘은 그래서 생명의 존재방식이며, 시 쓰기의 공간 자체다.

ㅡ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8 올해의 좋은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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