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는 오늘도 돌아요
압력 밭솥의 추처럼
얼음판 위를 할떡이는 팽이처럼
터질 듯한 마음의 골목골목
팽글팽글 돌아요, 돌아야 쓰러지지 않아요
당신의 경전을 맴돌면서
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때까지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어머니
신대륙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얕은 곳 너머 갑자기 희망이 깊어지는 곳
그러나 희망봉 근처엔 죽음의 이빨
백상어가 헤엄쳐 다닌다지요
가장 안전한 곳은 가장 위험한 곳
상식의 말뚝에 한쪽 발을 묶고
나머지 한 발로 절뚝절뚝
기상부터 취침까지
일상의 풀밭을 뱅글뱅글 돌아요
소등 뒤에도 전갈자리 사수자리 돌고 돌다
아주 돌아 버려요
아니, 저는 더 이상 돌지 않아요
그래도,
그래도 지구는 돌지요
*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 민음사, 2008. 7. 10.
.......
이 출항기의 의의를 저 수많은 술어들의 회전("돌아요")에 주목해서 간추려 보자. 첫째, 여성 오이디푸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는 것. "상식의 말뚝에 한쪽 발을 묶고/ 나머지 한 발로 절뚝절뚝/ 기상부터 취침까지/ 일상의 풀밭을 뱅글뱅글 돌아요." 다른 보폭과 보법을 가진 두 발은 필연적으로 불구다. 이 불구의 걸음이 두 세계를 동시에 답사하게 만든다. 그런데 두 발이 "상식"에 매였거나 "일상"을 맴돌 뿐이라면 오이디푸스적 여정이 아니지 않을까? 아니, 여정이 맞다. "소등 뒤에도" 나는 "전갈자리 사수자리"를 돌고 돌기 때문이다. 내 오이디푸스적 걸음은 낮/밤, 지상/천상, 일상/초월/을 두루 관통한다. 둘째, 이 회전은 실존 그 자체라는 것. 나는 "압력 밭솥의 추처럼/ 얼음판 위를 헐떡이는 팽이처럼" 돈다. 압력 밭솥의 추는 끓어오르는 정점을 지시하고, 팽이는 회전으로서만 바로 선다. 둘에게 회전은 외양이 아니라 본질이다. 회전을 통해서, 나는 어떤 정점에 있으며, 그 정점이 나 자신의 본질이라는 점을 확인한다. 셋째, 그럼에도 회전은 의심하는 작용이라는 것. "당신의 경전을 맴돌면서/ 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요. "정확히 말하면 이 의심은 확신의 반대가 아니라 확신의 정체다. 의심을 극한까지 추구하면 "신대륙"에 이를 것인데, 그곳의 희망은 "죽음의 이빨"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은 위험하지만 위험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신대륙이란 없다. 의심이 "가장 안전한 곳은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깨달음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을 의심함으로써 의심을 확신한다. 세계는 오이디푸스의 발걸음 앞에서 돌로 쪼개져 있다. 두 세계를 다 디디기 위해서 필요한 발걸음은 반신반의다. 넷째, 회전을 통해서 극한이 중용과 만난다는 것. 한 발은 묶여 있고 다른 한 발만이 걸음을 디디므로, 나의 행적은 원을 그린다. "나는 (......) 돌고 돌다/ 아주 돌아 버려요." 나는 일상의 영역만을 맴돌았을 뿐인데, 사실은 그로써 그 원환의 자리를 넘어서 버렸다. 마지막으로, 회전은 나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본질이기도 하다는 것. "그래도 지구는 돌지요." 갈릴레이의 저 유명한 일화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한 상태에서도 발언이 취소하지 못하는 진실을 역으로 폭로한다. 내 불구의 걸음이 두 세계의 진실을 밝힌다면, 역으로 세계의 분열이 내 걸음을 뒤틀게 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세계는 처음부터 오이디푸스적이었다.
걷는 발과 묶인 발이란 형상은 이런 오이디푸스적 보법(步法)의 극한적 표현이다. 이것은 정주와 일탈, 현실과 초현실, 삶과 죽음, 소문과 진실 등을 두루 아루른다. 하나는 고정점을, 하나는 원을 그리면서. 이 형상은 부동(不動)이자 회전이며, 부피도 면적도 없는 일점(一點)이자 가장 넓은 면적을 그려 내는 원주(圓周)이며, (자서에 따르면) "지금 여기"이자 '목적지'이다. 정채원의 시는 이 두 점(부동의 일점과 원주 위의 점)을 왕복한다.
ㅡ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작품 해설 [재투성이 오이디푸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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