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으로 가는 길, 키르키르 언덕엔 깎아지른 붉은 절벽 금방 주저앉을 듯 서 있지 한참 들여다보면 울고 가는 바람의 얼굴들도 비쳐 보인다는 큰 바위, 업경(業鏡) 속에선 스물세 살 내가 구겨진 편지를 움켜쥐고 자꾸만 훌쩍거리지 먼 이역 저잣거리에 갑자기 버려진 아이처럼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두리번,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지 긴 생머리에 반쯤 가려진 얼굴, 아무리 손 뻗어도 그 얼굴 쓰다듬을 순 없지 키르키르 절벽엔 다 닳아빠진 마애불 하나, 언제부터 거기 있었을까 합장한 손과 가부좌를 튼 무릎만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지 얼굴과 가슴이 있던 자리, 잔금들 무수히 주름처럼 지나간 그 자리, 물먹은 바람이 이따금 입술 씰룩이며 키르키르, 햇살이 가느다란 눈을 찡그리며 키르키르, 절벽 가슴에 귀 대고 들어 보네 그 위로 흐르다 만 빗물이 조금 번져 있어 지금도 마르는 중이지 구름 낮게 낀 하늘 아래, 그냥 스쳐 지나가려던 바람들 애타게 거들고 있지, 아직도
*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 민음사, 2008.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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