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말 [김수영]

초록여신 2008. 7. 3. 09:59

 

 

 

 

 

 

 

 

 

 

나무뿌리가 좀더 깊이 겨울을 향해 가라앉았다

이제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이 가슴의 동계(動悸)도 기침도 한기(寒氣)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집도 아내도 아들도 어머니도 다시 내 것이 아니다

오늘도 여전히 일을 하고 걱정하고

돈을 벌고 싸우고 오늘부터의 할일을 하지만

내 생명은 이미 맡기어진 생명

나의 질서는 죽음의 질서

온 세상이 죽음의 가치로 변해 버렸다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거리가 단축되고

익살스러울 만치 모든 질문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고해야 할 너무나 많은 말을 갖고 있지만

세상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무언의 말

이 때문에 아내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자식을 다루기 어려워지고 친구를

다루기 어려워지고

이 너무나 큰 어려움에 나는 입을 봉하고 있는 셈이고

무서운 무성의를 자행하고 있다

 

 

이 무언의 말

하늘의 빛이요 물의 빛이요 우연의 빛이요 우연의 말

죽음을 꿰뚫는 가장 무력한 말

죽음을 위한 말 죽음에 섬기는 말

고지식한 것을 제일 싫어하는 말

이 만능의 말

겨울의 말이자 봄의 말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 1964. 11. 22 >

 

 

 

 

 

* 김수영 전집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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