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나의 가족 [김수영]

초록여신 2015. 2. 17. 20:28

 

나의 가족

 김 수 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ㅡ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령(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 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鄕愁)와 우주의 위대감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안에서

나의 위대한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ㅡ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1954>




*김수영 전집  1 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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