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충규]

초록여신 2013. 9. 2. 14:47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김 충 규

 

 

 

 

 

 

 

 

 

 

라일락이 보일락 말락

어디에 숨었니? 내 사람

 

 

공기가 삭아내리는 소리

 

 

라일락 향기 지독해서

숨어버린 거니? 내 사람

 

 

라일락을 가진 집의 지붕 위에

찌그러진 심장 반쪽

다급히 숨은 거니? 내 사람

 

 

저 집은 죽은 고래

저 심장은 고래의 각혈 덩어리

 

 

내가 먼바다에서 잡아온 고래가

라일락 향기에 죽었다

 

 

내가 이 세상에 낳아보지 않은

희미한 딸이

멀리서 손짓하는 한참 오후

눈 비벼보며 아지랑이

 

 

삭은 공기를 질질 끌고 가는

허파에 구멍이 뚫린 늙은 바람

어디 숨어 우는 거니? 내 사람

 

 

내 심장을 꺼내 먹이면

고래가 숨을 얻어 허공을 헤엄쳐오를까

그러면 나타날 거니? 내 사람

 

 

라일락이 피기 전에 온대 해놓고 못 와서

어둠이 징검징검 허공 딛고 오도록

꼭꼭 숨어버린 거니? 내 사람

 

 

내가 심장을 꺼내기도 전에

심장에 불이 타도록

 

 

라일락 다 지고 고래 다 썩고

그런 뒤에 나타나려나? 내 사람

 

 

 

 

 

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문학동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