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진실
여 태 천
다시 한 번 기회를, 이따위를 구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최선이 아니겠냐고
정답 같은 게 있겠냐고
마땅치 않은 듯 기어이 하고 말았다.
한 사람이 문을 나섰고 커피가 나왔다.
천천히 멀어지는 건 잊히지 않는
검은 눈과 불안한 얼굴의 윤곽이 아니다.
멀리 뒤돌아서는 저 뭉게구름의 긴 그림자와
봄처럼 늦게 당도하는 시계의 분침
손바닥만 한 희망이 사라진 오후
캄캄한 커피 잔을 들여다보면
점점 흐릿해지는 것들이 보인다.
가장 멀리서 회전하는 것들과
한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들이
하지 못한 말과 함께 근근이 모여 있다.
버려진 어느 별처럼 나는
커피 잔 속을 느리게 회전한다.
빙글빙글 어제의 약속과 오늘의 절망이
뒤섞였다가 분리되는
지구의 시간이다.
식은 커피를 마신다.
저을수록 질서 정연해지는 감정들이
커피 잔 안에서 돌고 있다.
시집, 『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민음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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