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김충규]

초록여신 2013. 8. 24. 11:28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김 충 규

 

 

 

 

 

 

 

 

 

 

 

오늘 내가 공중의 화원에서 수확한 빛

그 빛을 몰래 당신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주었지

남은 빛으로 빚은 새를 공중에 날려보내며 무료를 달랬지

당신은 내내 잠에 빠져 있었지

매우 상냥한 것이 당신의 장점이지만

잠자는 모습은 좀 마녀 같아도 좋지 않을까 싶지

흐린 날이라면 비둘기를 불러 놀았겠지

비둘기는 자기들이 사람족이 다 된 줄 알지

친절하지만 너무 흔해서 새 같지가 않아서

비둘기가 아니라면 어느 새가 스스럼없이 내 곁에 올까

하루는 길지 당신은 늘 시간이 모자란다고 말하지만

그건 잠자는 시간이 길어서 그래

가령 아침의 창가에서 요정이 빛으로 뜨개질을 하는 소리

당신은 한 번도 듣지 못하지 그게 불행까진 아니지만 불운인 셈이지

노파들이 작은 수레로 주워모은 파지들이

오래지 않아 새 종이로 탄생하고 그 종이에

새로운 무장들이 인쇄되는 일은 참 즐겁지

파지 줍는 노파들에게 훈장을 하나씩!

당신도 그리 잠을 오래 잔다면

노파가 될 때 파지를 줍게 될 거야

라고 악담했지만 그런 당신의 모습도 나쁘진 않지

잠이 참 많은 당신이지 마부가 석탄 같은 어둠을 마차에 싣고

뚜벅뚜벅 서쪽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지 못하지만

꼭 봐야 할 건 아니지

잠자면서 잠꼬대를 종달새처럼 지저귈 때

바람 매운 날 이파리와 이파리가 서로 입술을 부비듯

한껏 내 입술도 부풀지

더 깊은 잠을 자도 돼요 당신

 

 

 

 

*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 문학동네, 2013. 3. 18.

 

 

 

시인의 말을 대신하며

 

 허공에게 바치는 시를 쓰고 싶은 밤이다. 비어 있는 듯하나 가득한 허공을 위하여. 허공의 공허와 허공의 아우성과 허공의 피흘림과 허공의 광기와 허공의 침묵을 위하여……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들어가 쉴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허락받기 위하여…… 소멸에 대해 생각해보는 밤이다. 소멸 이후에 대해, 그 이후의 이후에 대해…… 구름이란 것, 허공이 내지른 한숨…… 그 한숨에 내 한숨을 보태는 밤이다.

 

2012년 1월 16일 밤 10시 25분

김 충 규

 

///////

그 두 달 후인 2012년 3월 18일 새벽, 시인은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시인은 어쩌면 본인의 미래를 미리 예측한 것이 아닐까?

본인의 미래를,

그 허공의 시간들을...

시인이 떠난 서쪽...

그 서쪽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그 서쪽의 나라에서는 시인으로 영원하기를 빈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저 먹먹하고,

그저 안타깝고,

그저 공과 허와 시인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다.

 

처서가 하루 지난 오늘,

김충규 시인의 유작시집을 읽기에 참 좋은 계절이다.

(시인의 부재 앞에서, 초록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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