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다움

생장 [고영민]

초록여신 2013. 2. 27. 08:59

 

생장

 고 영 민

 

 

 

 

 

 

 

 

 

 

보름 만에 화분에 물을 주었다

이제 우리 집의 화초들은 안다, 나의 무관심을

그리하여 얼마나 물을 아껴 먹어야 하는지

몸속에 얼마 동안

고스란히 물을 저장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지난달에 봄비가 시원스레 내려

저녁나절 화분 두 개를 현관 앞에 내놓았다

빗물을 받아먹은 화초들은

노랗게 말라 죽기 시작했다

잠깐 방심했던 탓이리라

 

 

이제 우리 집의 화초들은 잘 안다

비 오는 날, 주인이

끙끙 무겁게 항아리를 들어

문밖에 자신들을 내놓는 것은 죽이려는 것임을

어떤 화분도 쉽게 갈증을 풀지 않는다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속꽃을 피워내지도 순을 올리지도

뿌리를 뻗지도 않는다

한때 자신들이 나에게 제라늄이었고

군자란이었고

루드베키아였다는 것을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아예, 기억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 사슴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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