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풀 시집
김 선 우
백수인 걸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출퇴근, 이런 말이 나오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도망다녔죠 굶지 않을 만큼 글 써서 벌고
죽지 않을 만큼 여행할 수 있으면 족했죠
그런데 이제 취직하고 싶어요
생애 최초의 구직 욕망이에요
바다풀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이력서를 쓰고 있어요
바다풀 공장에 취직하고 싶어요
나무들의 유령에 쫓겨 발목이 자꾸 끊어지는
잊을 만하면 덜컥 나타나는 악몽이 지겨워요
청동구두 같은 종이구두가 무서워요
(저 좀 들여보내주세요)
나무들에 대한 진부한 속죄는 말고바다풀 냄새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요
내가 만든 종이로 바다풀 시집을 엮고 싶어요
시집 자서(自序)엔 딱 두 줄만 쓸 거예요
나무들의 피냄새가 가시지 않아 아주 지겨운 날들이었어.
나는 그만 손 씻을래.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창비/ 201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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