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 푹푹 삶는 밤
박 정 대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저녁이 온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의 지붕보다 높은 내 방의 창가에서 눈에 뒤덮인 지붕들을 보았다
눈발의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가면 저 낮고 순결한 영토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이 내려서 저녁인지도 몰랐다, 계속 눈이 내려서 저녁인지도 몰랐다
등불들이 돋아나는 밤, 등불들은 내리는 눈발을 받아먹으며 발그레 피어올랐다
먼 곳의 소식처럼 먼 곳의 불빛들은 희끗희끗 날리는 눈발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불빛을 애써 보려 하지 않듯 나는 그 순간 먼 곳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눈이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 속으로 또 눈이 내렸다
허공에서 당당하게 어깨동무하고 내리는 눈이
아직 뭐라 아무런 이름 붙여지지 않은 눈이
地上의 고단한 옆구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까지 눈발들은 다 가주었다
저녁에 눈이 내렸다, 눈이 내려서 내가 묻지 못하는 사랑까지 눈발들은 다 물어주었다
밤새 자스민 푹푹 끓이던 밤이었다
시집 『아무르 기타』, 문학사상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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